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개변된 역사 (문단 편집) ==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자유 러시아]] == 해방 작전에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 100만명 중에 전향을 희망한 30만명이 소련에 맞서싸우겠다고 하여 결성되었다. 드높은 전의를 불태우지만 독일 등의 연합국은 이들을 불신하면서 기껏해야 후방치안 정도만 맡기려한다.[* 불신도 있지만 연합국이 소련과의 절멸전을 원하지 않다는 이유가 더 크다. 일례로 베를린 회담 당시 영국이나 벨기에 등 독일 서쪽의 국가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들여 소련을 전복시키자고 주장하자 이에 디트리히가 그럴거면 총동원령 선포하고 동부전선에 파병하라고 일갈한다. 그러자 처칠마저 주변의 만류로 아무말도 못했을 정도. 이렇듯 연합국 내에서조차 소련의 전복은 하고는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그러던중 연합국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소련의 벨라루스 공격[* 전략적 가치가 우크라이나보다 크게 떨어져서 이쪽으로 공세가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이건 소련도 똑같아서 전략적 가치가 너무 낮아서 벨라루스로 공격할 생각이 없었으나, 워낙 사기가 떨어져서 당장의 승리가 급한 탓에 벨라루스를 공격하게 됐다.]으로 급박하던 전세때문에 민스크 공방전에서 정식으로 전선에서 활약하는데 성공해서 연합국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에서 트로츠키의 공산 봉기가 실패하면서 반공주의 광풍이 미국을 휩쓰는 가운데 공공연하게 소련의 전복을 주장하는 자유 러시아가 미국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렇게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줄 알았으나, 미국이 해준다는 지원이 실제로는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을 간파한 디트리히로 인해 연합국의 자유 러시아 승인과 전후 스몰렌스크를 중심으로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를 영토로 보장해주겠다는 약속만 받게된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 집중하는라 지원 순위에서 크게 밀린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쿠르스크 공방전에 맞춰 연합국이 전 전선에서 펼친 공세에서 의욕적으로 스몰렌스크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소련군의 역습에 위기에 빠지지만 모델의 독일군에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다른 전선들의 승리 덕분에 어찌어찌 승리한다. 소련의 완전 전복을 원하는 만큼 적어도 모스크바까지는 함락시키는 것을 갈망한다. 종전협정에서는 자신들의 기여분이 적어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자 전쟁을 이어나가려고 '''소련 서기장이 탑승한 수송기를 격추한다.''' 이후 일방적으로 소련과의 정전을 깨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이다. 그러나 연합국 중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싶어하던 나라는 자유 러시아밖에 없었기에 나머지 나라는 모두 소련과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내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물론 미국의 지원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미래가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42년 가을에 미국의 지원을 대거 받아 야심차게 공세를 가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고. 이후에는 미국의 물자만 쪽쪽 빨아먹고 있다고 언급되며 미국에게도 손절당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졌고 결국 맥아더의 요청으로 완벽히 손절당해 케렌스키는 미국으로 도망치고 블라소프는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하지만 주동자들이나 민간인 학살을 지시하거나 가담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병력들은 가벼운 노동형이나 계급 강등을 당할 뿐 그 이상의 벌을 받지 않는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 여러모로 베트남 전쟁 당시의 남베트남을 연상시키는 엔딩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